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성경

다윗의 마지막 말로 본 영원한 언약(삼하 23:1-7)

빛나는향기 2024. 5. 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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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자, 예언적인 노래를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한 마지막 노래가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고 있는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삼하 23:1-7

1 이것은 다윗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한다. 높이 일으켜 세움을 받은 용사, 야곱의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 이스라엘에서 아름다운 시를 읊는 사람이 말한다.

2 주님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니, 그의 말씀이 나의 혀에 담겼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다스리는 왕은,

4 구름이 끼지 않은 아침에 떠오르는 맑은 아침 햇살과 같다고 하시고, 비가 온 뒤에 땅에서 새싹을 돋게 하는 햇빛과도 같다고 하셨다.

5 진실로 나의 왕실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지 아니한가?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만사에 아쉬움 없이 잘 갖추어 주시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어찌 나의 구원을 이루지 않으시며, 어찌 나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랴?

6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아무도 손으로 움켜 쥘 수 없는 가시덤불과 같아서,

7 쇠꼬챙이나 창자루가 없이는 만질 수도 없는 것, 불에 살라 태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면서 다윗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먼저 1절에서 다윗이 어떤 자인지 4가지 버전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다윗은 1) 이새의 아들, 2) 높이 세움 받은 용사, 3) 기름 부어 세워진 왕, 4) 이스라엘에서 아름다운 시를 읊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영이 다윗을 통해 하신 말씀을 2~4절까지 노래합니다. 

3절에 ‘모든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왕’을 우리에게 적용해봅시다. 첫째로 ‘나’를 공의로 살도록 다스려야 하고, 나와 관계 가운데 있는 ‘너’가 공의로 살도록 돕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속한 ‘우리’들 안에서 공의로 넘치게 해야 합니다. 공의가 무엇일까요? 공의는 우리가 살면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올바름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공의롭게 살고, 공의가 이루어지게 하려면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 나와 너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 나온 많은 ‘올바름’을 알고, 익히고, 행할 때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윗의 입을 통해 하신 ‘예언의 말씀’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다스리는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왕’은 구름이 끼지 않은 아주 맑고 화창한 아침 햇살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가 온 뒤에 땅에서 새싹을 돋게 하는 햇빛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왕은 힘 있고, 희망이 넘치는 왕일 것입니다. 아침에 맑은 햇살로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짓게 하고, 좋은 기분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땅 속에서 언제 올라올지 모르고 깜깜한 상태에 있던 씨앗이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하는 생명력을 주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5절을 집중해서 보아야 합니다. 5절을 보는 학자들은 4절까지의 내용과 5절 이후의 내용이 상반되고, 수사적으로 “영원한 언약”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을 보고 삽입된 구절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1절부터 7절까지 연결시킨 편집자의 의도를 따라 하나의 시로 생각하고 읽어보겠습니다. 

“영원한 언약”은 사무엘하 7장 15-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브루그만이 해석한 버전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신실한 사랑(헤세드, 개역개정은 은총이라고 번역)을 빼앗지 아니하리라 내가 사울에게서 한 것처럼 네 집과 내 나라가 내 앞에서 (든든한=견고한, 에무나) 영원히 보존되리라…” 이 언약은 나단의 신탁에서 그리고 아비가일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삼상 25:28). 이 언약이 이스라엘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다윗 왕위와 왕조는 과거에 일개 지파가 선언했던 주장을 넘어 훨씬 웅장하고 강력하게 확대되고, 고조됩니다. 모든 지파의 범위와 경계를 넘어서 영원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야웨는 다윗에게 당신의 신실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실한 사랑”과 “견고한”이 야웨의 신실한 사랑의 수혜자인 다윗 특유의 영향력을 집중 조명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시편 89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89편은 인자하심(헤세드), 성실하심(에무나)가 평행 관계를 형성합니다.(개역개정으로 보면 한눈에 보입니다) 이 시편에서는 어떤 왕조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언급 없이 야웨를 향한 영광의 송영이 가득합니다. 이 시편에서 두 단어는 야웨에 관한 가장 장엄한 주장을 선포하면서, 천상 궁정의 “거룩한 자들”을 언급하면서 우주적인 전망을 투사합니다. 모든 관심과 초점의 대상이 오직 야웨 한 분뿐입니다. 시편 89편이 끝부분인 18절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의 왕”이라는 어구가 언급됩니다. 이로써 이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의 왕정과 왕조의 현실을 염두에 둔 암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 암시가 의미하는 바는 ‘헤세드’와 ‘에무나’가 단순히 다윗을 향한 헌신이기보다는 야웨의 뜻과 의향이 발현된 것임을 확고히 합니다.

그런데 19절은 갑작스럽게 왕조로 시선을 돌립니다. 다윗과의 연관성을 토대로 신화적인 차원에서 역사적인 차원으로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사무엘하 7장에 제시된 다윗 언약을 정확하게 재차 반복합니다.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려야 할 대상인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과 특징이 다윗과 그의 왕조에게 부여되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수사적 전환입니다! 다윗의 왕조가 궁창의 확실한 증인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는 약속이 선언됩니다. 

그러나 시편 89편은 46-51절에서 볼 수 있듯이 탄식으로 끝이 납니다. 다윗의 왕정과 왕위가 굳건히 서기 전에 끊임없이 힘들고 혼란한 상황을 헤쳐 나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더 이상 유효해 보이지 않는 약속을 붙들고 호소합니다(49절). 다윗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은 아비가일의 입을 통해 고백된 지파 중심의 열정(삼상 25:28), 나단의 신탁 안에서는 균형 잡힌 확신(삼하 7:16)으로, 그리고 시편 89편에서는 예전적인 호소와 간구로 표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들 안에서 왕조에 대한 언급이 전무합니다. 그러나 다윗을 통해서 주어진 소망어린 암시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포로민들에게는 야웨의 ‘헤세드’가 그들과 함께 하며, 또 그 어떠한 재앙도 그것을 무효화시키거나 취소할 수 없음을 믿는 믿음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야웨의 “인자(헤세드)“에 관한 약속은 사무엘하 7장에서 파생된 여타의 본문들 안에서 더욱 풍성하고 자유로운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는 예레미야애가 3장 21-27절과 이사야 55장 3절에서 주후 587년 이후 야웨의 돌보심과 역사하심을 완전하게 확신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은 포로기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무엘하 7장과 시편 89편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7절에 후행은 야웨를 향한 열정적인 확신을 노래하며 자기-회의를 극복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상황을 거슬러 새로운 미래를 여는 주도권을 쥔 분은 오직 야웨 하나님 한 분뿐임을 드러냅니다. 

 

포로기가 끝날 즈음에 새 창조를 약속하는 이사야 55장 3절은 사무엘하 7장 14-15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전혀 다른 요점을 제시합니다. 오토 아이스펠트는 이 본문에 시편 89편이 문자적으로 그것도 아주 상세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새 창조의 약속을 공유하는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특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사무엘하 7장을 은유적인 방법으로 인용했다고 설명합니다. 즉 장차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는 전망이, 다윗 언약이 직접적으로 주어진 다윗의 가문과 왕조에만 한정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공동체로 확장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다양한 목소리와 관심사들이 존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사회를 향한 야웨의 약속도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은 성경 본문 여러 곳에서 저마다 상이한 소망으로 다시금 표현되고 있다는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그 본문들은 한결같이 다윗의 진실을 견고히 붙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아무런 동요나 흔들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89편에는 신정론에 관한 문제가 잇따라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앞에 정확한 모양의 미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미래의 소망을 받아들입니다. 야웨께서 다윗을 향해 베푸신 전적인 헌신과 사랑은 신뢰할 만한 정도를 넘어서서 다른 무엇보다도 최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다윗을 그대로 묘사하는 데에 그렇게 집착하진 않았습니다. 

다윗은 약속의 담지자의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듯한 혹독한 현실에 대항하고 미래를 활짝 열어젖힐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영원한 언약”은 확실하고, 견고하게 약속된 미래에 관한 진실입니다. 앞서 본 본문들은 “영원한 언약”을 기초로 하여 펼쳐질 미래를 단호하게 직시하는 관점을 공유합니다. 또한 “영원한 언약”을 말하는 본문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를 통해 이루실 미래의 꿈과 약속을 친히 이끌어 가시고 역사하신다는 진실을 확고히 주장합니다. 

역대기와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는 인상 깊은 장면들이 가득 있습니다.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다윗의 면모는 포로기 이후 신실한 회중으로 서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던 신앙 공동체에게 중요한 본보기가 됩니다. 또한 다윗은 끊임없이 야웨를 향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충성스러운 절개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다윗처럼 야웨를 향해 예민하게 반응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자세는 그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기억과 회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에게도 요구될 만큼 특별히 중요한 요소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윗과 그의 백성에게 변함없이 신실하게 대해 주신 다윗의 하나님으로 투사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의 경건과 야웨의 신실하심은 예전과 제의를 통해 서로 매개되어 하나의 실재로 드러납니다. 전제 왕정을 꿈꾸던 왕국의 정치적 선전과 망상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는 공적으로 시행한 예전과 제의가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윗에 관한 다른 문헌에서 예배와 제의에 대한 강조점을 찾아볼 수 없지만, 포로지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예배와 제의를 통해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의 전망과 역량을 드러냅니다. 이 공동체가 신뢰했던 다윗의 진실은 예전적 진실입니다. 이는 공동체가 “예배를 지향하는” 예배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게 합니다.

다윗은 왕정 안에서 공의로 살면서 그 시대뿐만 아니라, 이후에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와 이방 땅 한복판에서 신앙 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는 힘과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이는 4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딱 들어맞습니다. 믿음을 근간으로 한 공동체는 삶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다른 형태의 소망들은 뒤로 한 채,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진정한 소망을 갖기로 합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 모두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인정하는 신앙적 선언입니다.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미래에도 역사적으로 성취되게 한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왜 그토록 매력적인 인물로 보일까요? 다윗은 굉장히 인간적입니다. 우리와 비슷하지요. 그런데 우리와 엄연히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설득하고 이끄는 탁월한 리더십이 발현되도록 하는 대담함과 위엄이 있습니다. 탁월한 리더십 안에는 계략이나 획책이 아니라 순전하고 진심 어린 방법으로 사람들의 이해와 설득을 얻어내는 강인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윗과 우리를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자신을 넘어설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다윗의 인물 됨됨이를 요약해 놓은 구절을 한 번 읽어봅시다. 역대기상 29장 14절입니다. 이 구절은 다윗에 관한 변함없는 특징이 포착된 부분입니다.(제가 무엇이며, 저의 백성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렇듯이 기쁜 마음으로 바칠 힘을 주셨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셨으므로, 우리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님께 바쳤을 뿐입니다.) 다윗은 인생이란 모든 영역에서 이러저러한 요인들에 의해 영향받고 곤란한 상황에 처해 혹사를 당할 수도 있지만, 끝내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다시 하나님께 돌리는 인물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13절에서 골리앗과 싸울 때 그리고 사무엘하 12장 13절에서 회개하며 인생이 계획하고 뜻한 바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닫고,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 손에 의탁하는 장면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무엘하 7:8-16에서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밝힌 것에 대해 다윗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리는” 기도를 통해 그 선물을 받습니다(삼하 7:18-22).

역대기상 29장 14절은 다윗이 비움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항복에 해당하는 전승들을 기록한 것이며, 이들은 한결같이 반복적으로 이 주제로 말합니다. 물론 다윗이 무자비하고 교활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순전하고 소박한 인간적인 면모가 있습니다. 

다윗에 관한 전승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여러 태도와 모습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무엘하 23장 14-17절은 다윗의 놀라운 인간적인 섬세함과 결속을 보여줍니다. 역대기상 29장 14절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철저한 항복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놀라운 인간적인 섬세함과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항복이라는 두 가지의 결정적인 자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이 두 가지 자질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가장 절박하게 요청되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남긴 마지막 말과 영원한 언약이 지금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다윗의 삶을 배우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아는 우리가 마지막 말을 남긴다면 어떻게 남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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